1. 박완서 선생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입니다. 그래서 특히 글이 잘 안 써질 때면 선생님의 작품을 찾아 읽지요. 예전에 김영하 작가님의 팟캐스트에서 선생님의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작품이 소개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김영하 작가는 선생님의 작품을 '수다의 문학'이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얌전하다가도 어느 순간 입담이 좋아지는 동네 인싸 아주머니가 쉼 없이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이번에도 며칠째 글이 잘 안 써져서 습관적으로 선생님의 2008년도 작품인 <그 남자네 집>을 찾아 읽었습니다.
2. 이 작품은 선생님이 2002년에 발표한 단편을 장편으로 다시 쓴 작품입니다. 배경은 한국전쟁 후 새롭게 재건되던 서울입니다. 선생님 특유의 다정하고 섬세한 문체로 해방직후의 혼란한 사회상, 그리고 서울의 모습이 생생히 재현됩니다. 제목의 '그 남자'는 첫사랑, 옛사랑의 그 사람입니다. 그 남자와 주인공은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오가며 서로를 찾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첫사랑이었고 결혼 후 외도의 대상이었지만 큰 병에 걸려 한심한 사람이 되어 멀어지거든요. 하지만 결국 화해의 포옹을 하며 작품은 끝이 납니다. 이 작품은 읽으면서 좀 충격적이기도 했는데요. 주인공은 안정적인 결혼생활에 만족하면서도 또 다른 사랑, 불륜에 대한 욕망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거든요. 한국판 보바리 부인, 나비부인 같은 느낌도 살짝 있습니다.
위로받고 싶다지 않나. 그 남자가 위로받고 싶은 건 첫사랑의 상처, 금지된 욕망의 고통이 아닐 것인가. 그는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3. 작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서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태백산맥>처럼 주제가 크지는 않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지만, 특히 여성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무척 뛰어나다고 느꼈습니다. 안정적인 은행원인 남편, 헌신적인 시어머니와 함께 하는 결혼생활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지만, 그 와중에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심리적인 갈등들에 대한 묘사가 기가 막히거든요. 그리고 4명의 아이들을 길러낸 어머니로써의 상황도 자세히 그려집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어떻게 자랐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나는 마치 젖먹이는 업고, 젖 떨어진 애는 걸리고 길을 가다가, 걸어가는 애가 저로 업어달라든가, 뭘 사달라고 떼를 쓸 때, 길바닥이건, 남이 보건 말건 가차 없이 그 녀석의 궁둥이를 까고 철썩철썩 볼기를 칠 때 같은 육친애적이고 떳떳한 분노가 치미는 걸 걷잡을 수 없었다.
4. 그리도 또 하나 인상적인 인물 '춘희'가 등장하는데요. 7남매 중 첫째로 가족을 위해 미군부대에 취직하고, 결국 양공주가 되어 고된 삶을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인물입니다. 인생 전체를 가족을 위해 희생했지만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 그러면서도 끝까지 가족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성 캐릭터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에는 이렇게 꼭 인상적인 여성들의 모습이 많이 보여서 좋습니다. 모르던 세계를 알게 해 주시니까요. 작품 후반에 나오는 주인공과 춘희와의 통화내용은 큰 잔상을 남길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5. 잘 깍아지고 다듬어진 한 편의 예술작품 같은 한글 문학을 읽고 싶다면 전 언제나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번역된 외국 소설도 좋은 작품이 많지만 우리 글로 써진 작품을 읽는 맛이라는 게 또 있거든요. 마지막까지 점점 더 농후해진 글솜씨로 작품활동을 계속하셨고, 후배작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소주 마시기를 좋아하셨다는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분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큰 축복이겠지요. 다시 한번 좋은 작품에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섯줄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섯줄리뷰] 세이노의 가르침 (2) | 2024.07.21 |
---|---|
<다섯줄리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1) | 2024.07.08 |
[다섯줄리뷰] 김민식 / 매일 아침 써봤니? (0) | 2024.05.31 |
[다섯줄리뷰] 존 그린 /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0) | 2024.05.17 |
[다섯줄리뷰] 김혜남/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0) | 2024.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