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저는 이국종 교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을 구해낸 분이고, 재미있게 봤던 <낭만닥터 김사부>의 실제모델로도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가끔 TV나 유튜브에서 강연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으니 아주 잘 나가는 의사 중 한 분이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실 이국종 교수님은 수행자와 같은 고달픈 인생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며 성과를 만들어오신 극한의 끈기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지금, 이전보다 큰 존경심을 느끼면서도 어느 정도의 안쓰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목마른 사람. 두 마디의 말이 불러오는 바람이 씁쓸했다. 나는 내 목마름의 근원을 알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런 기갈과 허기를 느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목말라해야 하는지, 중증외상센터 사업을 받아 진행하는 것이 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2. 책은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를 기록한 책이 1권, 그 이후 2018년까지가 2권입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이국종 교수님이 직접 기록한 것을 정리한 것인데요. 그 대쪽 같은 성정상 절대 대필 작가는 쓰지 않으셨을 테니, 그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많은 기록을 남기셨다는 것아 참 대단합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교수님의 문학적 소양입니다. 설명하고자 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무척 뛰어나고요. 그 상황에 대해 느끼는 본인의 심정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뭐랄까 시적이라고 할까요. 암튼 범상치 않은 분입니다.
비루한 말들을 그러모아 문장을 써 내려갈 때 펜 끝은 방향을 자꾸 잃었다. 팔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팔을 달래며 한 자씩 겨우겨우 써나갔다.
3. 교수님은 아덴만의 여명작전으로 유명한 석해균 선장을 구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훨씬 전부터 많은 일들을 해오신 분이었습니다. 특히 국내에는 정착하지 못하던 외상외과를 위해 많은 헌신을 하셨지요. 꼭 필요한 일이고 교수님 말고도 의지를 갖고 있었던 정부, 정치, 의료계 인사들이 있었는데도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석해균 프로젝트를 겪으면서 그가 원했던 건 선진국형 항공이송 시스템의 도입과 정착이었습니다. 요약하자만 '긴급환자가 생기면 가장 빨리 환자에게 접근할 수 있게 헬기를 이용한다. 그리고 처치를 하면서 병원으로 빠르게 데려온다. 그 과정에 생기는 일들은 합리적으로 해결한다'는 건데요. 이 당연한 일이 왜 그토록 힘들었고 지금도 완전치 못한 지는 책을 보면 절절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회의석상의 누구도 환자 항공 이송에 도움이 될 것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아무도 선진국형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로지 외상센터 사업이 풍기는 돈 냄새만이 중요했다.
4. 책에서 교수님은 냉소적이지만 간결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합니다. 무언가 작심하고 발언하는 사람처럼 결기도 가득합니다. 그 치열한 과정을 견뎌내며 우리나라의 응급의학에 한 축을 구축해 냈지만 자기 자랑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본인에게 주어진 과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해 준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을 많이 표현했고, 함께 환자들을 구한 해병들과 헬기 기장들에 대한 미안함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현장의 절박함이 윗대가리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병원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누군가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은지 속이 상하더군요. 물론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는 너무 심사숙고를 하는 그의 우유부단함에 속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비판은 통렬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안을 제안하기보다는 그저 홀로 침전하는 것 같아 실망스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교수님은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요.
내가 외상센터라는, 한국에는 정착할 수 없어 보이는 괴이한 일을 할 때마다 나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를 알고도 그만두지 못했고, 문제의 본질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은 내 권한 밖의 일이었으므로, 나는 늘 진퇴양난 속이었다.
5. 결국 교수님은 한쪽 눈이 실명될 정도로 건강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끝내 의사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그 치열한 상황들과 고뇌를 끝으로 책을 마무리가 됩니다. 현재는 국군대전병원장으로 임명되어 (23년 12월) 또 다른 역할을 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세월호 사고에서도 헬기로 출동한 후 접근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한 채 가라앉고 있는 배 위를 돌며 무엇이라도 하려 하려 했던 교수님이라면, 그저 평범한 병원장으로 편안한 노후를 보내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생 많으신 분께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교수님 또 수고 좀 해주십시오. 그리고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출동에서 병원으로의 복귀 비행은 환자를 처치자며 오느라 늘 피가 타들어간다. 그래서 가끔 있는 이런 편안한 비행은 몹시 비현실적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부담이 없었다. 창밖의 겨울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나는 그 순간을 머릿속에 오래, 깊이 박아 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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